커버스토리. [추천사, 독자의 마음을 여는 한마디], 추천과 비평 사이, 비평가의 자세, 진정한 비평가는 멸종하고 있는가, 추천사와 문학비평의 경계: 독자의 마음을 여는 비평가의 자세

커버스토리. [추천사, 독자의 마음을 여는 한마디], 추천과 비평 사이, 비평가의 자세, 진정한 비평가는 멸종하고 있는가, 추천사와 문학비평의 경계: 독자의 마음을 여는 비평가의 자세

 

 

 

커버스토리
[추천사, 독자의 마음을 여는 한마디]
추천과 비평 사이, 비평가의 자세
유희석(전남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 문학평론가)
2025. 9+10.

 

 

추천사와 문학비평, 비평가의 자세, 문학과 시장의 관계, 독자의 마음과 신뢰, 한국문학과 비평

 

진정한 비평가는 멸종하고 있는가

‘문학도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귀에 지당하게 들리고 나 자신도 최근 어떤 졸문에서 쓴 바 있다.1) 문학비평도 물론 사람의 일이다. 그런데 생존 작가의 작품을 평하는 비평은 미묘한 구석이 많고 그 참뜻을 깊이 헤아려보는 일도 쉽지 않다. 사람살이의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섞여 들어가서 발생하는 문제가 비평행위에 스밀 위험도 클 뿐더러 그런 위험에서 비롯되는 모종의 오염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무사(思無邪)를 향한 치열한 비평조차도 이해관계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쉽지 않으리라.


『논어』(공자), “시 300편은 한마디로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다.”에서 유래된 ‘사무사’
(출처: 챗GPT(ChatGPT))

그렇다면 좀 더 솔직하게 비평가의 태생적 한계를 자인해야 옳다. 동시에 추천사나 주례사와는 거리가 먼 사무사의 정신으로 평가를 시도하는 비평가라면 사사로움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자인과 노력으로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나는 거의 20년 전에 문학 서평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서 어느 신문 기고에 “우리 문화 현장에서 인터넷 서평을 선도하는 블로거의 활약도 옥석을 분별하는 본격 비평의 지평을 지향해야만 ‘시장’의 들러리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라고 썼지만 지금 비평가들이 직면한 상황은 당시보다 더 좋아진 것 같지는 않다.

“창작은 안 하세요?” 여러 번 받아본 이 질문에는 비평의 빈곤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 창작보다 비평을 한 급 아래로 보는 시선이 따가운 것이다. 나는 뭐라고 딱 부러지게 답하지 못하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비평가는 독자와도 다르고, 창작자는 물론 철학자와도 구분되는, 그 나름으로 고유하고 희귀한 존재라고 믿는다. 또한 비평가의 존재 증명은 이 세 부류가 쓸 수 없는 비평문에서 이룩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런가? 이렇게 되묻는 심정은 무척 착잡하면서도 복잡하다. 내가 이와 같은 비평가 인가 하는 자문은 차치하더라도 작가와 독자가 쓰기 힘든 비평문을 사무사의 정신으로 쓸 수 있는 비평가는 이제 거의 멸종되었거나 멸종 상태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지금 한국 평단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들을 이런저런 출판사의 자발적․비자발적 용역(用役)들이라고 한다면 실례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용역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논자가 있다면 그런 강변이야말로 사무사의 비평이 멸종 중임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추천사와 문학비평, 비평가의 자세, 문학과 시장의 관계, 독자의 마음과 신뢰, 한국문학과 비평

 

자본주의 시대, 추천사와 비평 윤리

어찌하여 그러한 비평가가 사라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돈키호테(Don Quixote)』(1605~1615)와 아베야네다(Avellaneda)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그의 위작(僞作)(1614)의 존재가 말해주는 것처럼 독자-출판사-출판시장이 소비자-생산자-소비시장 이라는 복마전(伏魔殿)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7세기 중반부터이다. 자본주의 근대의 난숙에 따라 그 세 개의 축이 물 샐 틈 없이 자본의 논리로써 굴러가는 체제에서 사무사라는 것은 꽃노래에 불과하다.


출처: 챗GPT

이 세 개의 축의 구도를 냉정하게 직시한다면 작가는 때로는 대개 문학잡지를 거느린 출판사의 주문에 응하면서 협업하는 생산자가 된다. 비평가는 판촉을 담당하는 판매원에 가깝다. 문학 시장의 판로 개척에 관한 한―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고비용·저효율의 상징적 존재가 비평가다. 대학에서 문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라고 해서 판매원의 신분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닐 듯하다. 그들 역시 문학 시장에 언제든 동원될 수 있는 ‘예비군’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들에 놀라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문학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잘 모르기 십상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도 아주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근대문학의 출범 이래 줄곧 그래왔을 뿐이다. 오늘날 돈의 지배가 더 노골적이면서 뻔뻔해졌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의 마음을 여는 한 마디, 추천사’라는 청탁받은 이 글의 큰 주제에 대해서 동일한 논리가 적용될까? 일단 적용된다고 봐야 한다. 한 북칼럼니스트는 이 주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푸념한 바 있지 않은가. “추천사조차도 하나의 장식이 되어 버린 시대에 띠지에 쓰일 유명인의 추천사를 찾아 헤매는 일이 작가와 출판사의 또 다른 숙제가 되어 버렸다. ‘시대 유감’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 하지 않을까?”2) 목적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여서 판매고를 올리는 데 있을 뿐이라면 시대 유감은 헛말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무사에 비평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고 확신하는 비평가에게는 이윤 추구라는 시장의 냉혹한 논리가 문학에도 어김없이 관철되고 있다는 사실을 더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시장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그런 과제를 해낼 수는 없다. 정확하고 온당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문학 시장의 생리에 맞춰 추천사를 쓰는 것과 좋은 작품을 최선의 마음으로 추천사를 쓰는 것은 사뭇 다른 문제라는 점을 의식하는 마음가짐이 못지않게 필요하다.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추천사의 대상 도서를 선정할 때도 한결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 양식(良識)도 그와 같은 조심스러움이 없이는 참답게 보존․계승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품으로 증명되는 추천사의 진심

통계를 들이댈 계제는 아니지만 유명인의 몇 마디 추천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도서 중에서 극소수만이 ‘스테디셀러’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 한편, 책방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책도 불현듯 망각에서 깨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모든 추천사를 과대광고와 허언으로 몰아세울 수 없듯이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반드시 마케팅의 힘을 빌린 이류, 삼류문학인 것은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좋은 작품이 대중 독자에 외면당하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는 ‘물건’을 앞에 두고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가령 김기태 작가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에 딸린 세 편의 추천사를 읽어보자. 그중 “건조하지만 극진하고, 세심하지만 드넓은 문체, 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힘. 나는 김기태가 응원의 태도를 발명하고 있다고 여겼다.”라는 임솔아 작가의 추천사는 김기태의 작품에 대한 정확하고도 진실된 찬사라고 본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주목받고 팔리는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의 경우는 어떨까? 이 베스트셀러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개선된 것 같지만 여전한 차별적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탁월한 소설로서의 고발인가’를 묻기 시작하면 물음표가 달리고 책 맨 뒷면에 실린 추천사나 여성학자의 작품 해설도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표지와 추천사가 담긴 책 뒤표지(표4)

2025년 8월 첫 주 현재 한 달 넘게 소설 부문 판매지수 1위를 달리고 있는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는 어떤가? 진품, 진짜라는 의미의 일본어, 혼모노(ほんもの)를 그대로 제목으로 차용한 데서는 모종의 도발성도 느껴진다. ‘가짜들이 판치는 짝퉁 소설시장에서 이건 진짜야’라는 식의 도발. 이 단편집에는 박정민 배우와 이기호 작가의 추천사가 붙어 있다. 물론 평론가의 소개글도 빠지지 않는다. 책 뒷면에 들어가는 추천인의 말은―‘표4* 장르’라고 부르는―장르의 특성상 순도 100%의 찬사로 구성된다. 이기호 작가의 추천은 상대적으로 점잖은 편인 반면에 유명한 배우인 박정민 무제 대표의 표4는 “이 소설집은 ‘몰입’의 파티다. 영화로 만들고 싶은 작품들로 가득하다.”로 시작한다. ‘추천의 말’에는 그의 좀 더 긴 추천사가 들어 있는데, “넷플릿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광고로 끝난다. 이들의 추천사 덕을 얼마나 봤는지는 몰라도 『혼모노』는 현재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고 있다.
* 책의 뒤표지를 일컫는 출판 용어(표1: 앞표지, 표2: 앞날개, 표3: 뒷날개, 표4: 뒤표지)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일단 개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품이라면 대중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만하겠다는 느낌이니 더러 수사의 과잉이나 과장이 거슬린다 해도 추천사의 변 자체를 책잡고 싶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표4 장르의 순기능을 무조건 깎아내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더 그렇다. 반추해 보면 추천사의 ‘진심’은 추천인의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추천 대상인 작품에서 확인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추천사의 장르적 미덕과 한계, 비평에서의 균형 감각, 그리고 『혼모노』의 ‘대중성’에 대해 한 작품을 콕 집어서 내 나름의 소감을 결론 삼아 펼쳐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혼모노』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비평

“훔치고 싶은 재능으로 번뜩이는 한국문학의 미래”라는 선전 문구에 동의한다 해도 『혼모노』에 실린 단편 7편 모두가 주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중 단편 「스무드」의 묘미는 화자에 있다. ‘듀이(Dewey)’라는 이름의 화자는 재미교포 3세다. 한국에 대한 그의 인식은 1968년에서 1980년까지 방영된 미국 수사드라마 <하와이 파이브 오(Hawaii Five-O)>에 머물러 있다. “뱀술이나 개고기를 파는 상점이 즐비한 우범지대, 낡고 부서진 건물들”로 제시한 개발도상국 한국. ‘제프(Jeff)’라는 설치예술가의 매니저 자격으로 방한한 화자를 내세운 「스무드」는 매우 불편할 수 있는 주제를 아주 매끄럽게 다룬 이야기다. 너무 매끄러워서 불편할 정도다. 한국계지만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 미국인이 서울의 최고급 아파트에 딸린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면서 서울 탐방에 나섰다가 광화문에서 열린 ‘극우 집회’참가자들과 만나서 환대받는 사연을 다뤘다.

광화문 광장을 이승만 광장으로 개칭하고 서로를 열사라고 부르는, 박정희를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듀이에게 친절을 베풀며 평화롭게 축제 같은 집회를 하는 장면 장면을 작가는 담담하게 풀어낸 단편이다. 하지만 이 담담함이 보수든 진보든 아니면 중도든 (한국의) 독자에게 안겨주는 상념은 간단할 수 없다. 이 이야기의 묘미와 문제성은 결코 간단할 수 없는 서사를 ‘생각 없는 화자’를 내세워 짐짓 모르쇠로 일관하며 처리한 데 있다. 듀이가 성조기와 “타이극기”가 나란히 나부끼는 극우 집회에 참석한 이들과 한나절이나마 푸근하게 동포의 정을 나누고 이들 삶의 속살을 언뜻언뜻 때로는 울컥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이야기에서 정치적 해석을 끌어낼 수 있는 실마리는 일절 주어져 있지 않다.

바로 그래서 특히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시도에 치를 떠는 독자라면 듀이에게서 채만식의 「치숙(痴叔)」(1938)의 1인칭 화자인 ‘나’의 몽매함을 읽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듀이는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순진할지언정 「치숙」의 ‘나’가 아니다. 그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전무한 한국계 미국인이며, 그에게 환대를 베푼 집회의 사람들 역시 우리 주변에 흔한 부모, 형제, 이웃 들이다. 좌나 우의 시각으로 보는 한 듀이를 어떤 식으로든 ‘평가’하려 들겠지만, 그는 아버지의 영향과 그가 자란 환경으로 인해 한국과는 아예 담을 쌓아놓고 살아온 미국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을 떠나면서 웅얼거리는 말,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은 하루였어요.”라는 그의 출장 소감도 우리가 믿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듀이가 아니라 「스무드」라는 단편 자체라면 평가는 사뭇 달라진다.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이 작품은 소품이며, 왕년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양분된―지금도 진영으로 극렬하게 갈린―한국 사회의 핵심적 진실도 건드리지 못했다. 『혼모노』에 실린 여타 작품들이 모두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듀이에 대한 풍자적, 내지는 아이러니한 시선의 결핍은 결과적으로 「스무드」를 매끄럽게 만들었지만, 그런 결핍과 매끄러움은 작가가 기술자로서의 이야기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 만든다. 「스무드」가 「치숙」과 갈리는 지점은 바로 그 부분인 것 같다. 요컨대 「치숙」에서는 달변이 청산유수일수록 식민지 현실에 눈먼 화자의 어리석음(痴心)이 사정없이 까발려진다. 반면에 「스무드」는 한국 사회의 이념적 모순과 갈등에 대해 시치미 뚝 떼고 듀이의 한국 출장을 나름 재미있게 ‘있는 그대로’ 그렸지만 ‘있는 그대로’가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유도하기보다는 이야기의 야릇함에 스스로 탐닉하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추천과 비평 사이, 비평가의 자세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스무드」의 재현 방식을 꼬집은 셈이지만 한자리에 앉아서 죽 내리읽을 수 있는 이 단편의 ‘재미’를 나는 뒤집어본 셈이다. 표제작인 「혼모노」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는 ‘진짜’에 대한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는 통찰을 제각각 보여준다. 추천사라는 형식으로 잡는 비평의 균형은 이 작품집의 경우 특히 어렵겠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어떤 글이든 과장은 미덕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널리 읽힐 만한 양서라면 다소 부풀리는 수사(修辭)도 어느 정도는 용납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그 정도가 관건이다. 모든 것이 ‘팔리는 것’을 기준으로 평가되는 문학 시장에서 추천사는 어떤면에서 계륵(鷄肋)이면서 그 이상의 것이다. 별로 좋지 않은 것이 더 좋은 것을 구석으로 밀어 넣어 안보이게 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면, 사람들이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광고하는 일도 필요악 이상의 순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K-○○’라고 하는 한국의 문화적 성취도 그와 같은 소소한 일이 조금씩 축적되어 가능해진 결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멸종 중일지언정 문학을 업으로 삼는 비평가의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균형이 아니다. 균형도 가장 좋은 작품, 덜 좋은 작품, 좋지 않은 작품을 제대로 읽고 사심 없이 평가하고 추천하는 비평가의 흔들리는 자세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런 자세라면 그 ‘좋음’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왜 좋은가를 더 깊이 사유하는 비평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비평이 이해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믿어서는 곤란하다. 온갖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벌어지는 세속에서만 가능한 사무사의 경지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뿐이며, 문학비평에서도 오직 그와 같은 경지를 향한 노력만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 유희석(2025.02.), “‘우리 것다운’ 문학을 향한 사랑과 헌신: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을 읽고”, <창작과비평>2025년 봄호, https://magazine.changbi.com/MCQuarterly/Item/7148
2) 홍순철(2025.08.), “추천사가 베스트셀러를 결정하는 시대”,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212211.html

 

 

 

 

<출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추천사와 문학비평, 비평가의 자세, 문학과 시장의 관계, 독자의 마음과 신뢰, 한국문학과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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