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회고록 출간이 불러일으킨 스페인 출판계 내 표현의 자유 논란, 인세, 인쇄출판, 자가출판
4월 스페인 출판시장 보고서
코디네이터 | 이민재
이달의 출판계 이슈
범죄자 회고록 출간이 불러일으킨 스페인 출판계 내 표현의 자유 논란
최근 스페인 출판계는 한 책의 출간을 앞두고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문제가 된 책은 호세 브레톤(Jose Breton)이라는 사람의 범죄 회고를 바탕으로 작가 루이헤 마르틴(Luisge Martin)이 쓴 《증오》(El Odio)라는 책이다. 이 책이 문제가 된 이유는 바로 회고의 주인공 호세 브레톤이 친자녀 두 명을 살해한 죄로 40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기 때문이다.
작가 루이헤 마르틴은 이런 범죄자 호세 브레톤과 3년간 전화 통화와 편지를 통한 소통 끝에 일종의 범죄 회고록인 《증오》를 집필했고, 이 책은 스페인의 주요 출판사 중 하나인 아나그라마(Anagrama)를 통해 올해 3월 말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전해 들은 호세 브레톤의 전처이자 희생된 아이들의 친모인 루스 오르티스가 검찰에 책의 출간을 금지해 달라고 고소장을 제출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스페인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출판 윤리 중 어떤 것이 더 선행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루스 오르티스는 검찰 고소 사유로 이 책이 자신과 희생된 아이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자신의 사생활을 침범한다고 밝혔다. 이후 이어진 언론 인터뷰에서 루스 오르티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만약 작가가 살인자와 소통해 집필하였더라도 일반적인 범죄자의 심리 상태를 다루는 책이었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으나, 《증오》는 분명하게 루스 오르티스의 자식이기도 한 아이들의 살인사건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극복하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한 자신을 다시 과거에 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출간되어선 안 되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표현한 근거는 호세 브레톤이 징역 40년 형을 구형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처인 루스 오르티스에게 연락하는 것도 금지되었는데 이 책은 루스 오르티스 입장에서 본인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도 있는 내용이다. 피해자에게 불안과 극심한 고통을 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원은 피해자이자 고소인의 입장에서 책 출간을 금지해 달라고 한 검찰의 요청과 달리 표현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판결을 내렸고 검찰은 항소를 결정했다. 그리고 많은 논란과 비난을 의식해 지난달 말, 출판사 아나그라마는 일단 최종 판결 전까지 《증오》 출간을 무기한 미루기로 일단 결정하였다. 출판사의 결정에 앞서 일부 서점은 책이 출간되더라도 절대 서점에 입고하여 판매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언론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루이헤 마르틴의 <증오> 표지
사실 《증오》가 스페인에서 처음 다루어진 실화 범죄 도서는 아니다. 범죄자의 회고록 형태는 아니지만 이전에도 스페인에는 실화 범죄를 바탕으로 쓰인 책들이 있었으며, 출판사는 이 책을 가까운 나라 프랑스의 존경 받는 작가 엠마뉘엘 까레르의 《적》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작가 루이헤 마르틴 역시 뜨내기 작가가 아니다. 1989년부터 활동한 작가로 2020년에는 《백일의 밤>(Cien noches)이라는 작품으로 스페인 아나그라마 출판사가 주관하는 문학상 에랄데(Herralde)의 소설 부문 수상했으며,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스페인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앙헬라스 곤살레스-신데의 자문위원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출판사 아나그라마 역시 앞서 언급한 권위 있는 문학상 에랄데의 주관사이자 스페인에서 가장 손에 꼽히는 출판사 중 하나이다. 게다가 실화 범죄를 다룬 스페인의 여러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지금도 TV와 넷플릭스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중이다. 그런데도 왜 유독 이 작품의 출간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컸을까?
작가는 이 작품이 살인을 두둔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거나 살인자의 목소리만 담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살인자의 진술에 반대하기도 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범죄의 심연을 들여다보려 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스페인 사회에서 ‘선을 넘었다’라는 평을 받았다. 여전히 피해자 중 한 명인 전처가 살아 있고 또 스페인 사회에 너무 큰 충격을 준 유아 살인이자 친족 살인이라는 점에서 가족을 중시하는 스페인 문화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소재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단지 그게 전부일까?
도서는 아니지만, 스페인에서는 지난해 넷플릭스를 통해 <아순타 사건(El caso Asunta)>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방영된 바 있다. 앞서 문제가 된 호세 브레톤 사건과 비슷하게, 지난 2013년 스페인에서 벌어진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 사건을 재연한 드라마이다. 이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에서도 배우들의 열연으로 화제가 되었다. 비슷한 친족 살해 사건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인데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인지를 알아보면 도서 《증오》를 향한 대중과 사회의 비난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우선 <아순타 사건>은 살인 범죄자들의 목소리를 담지 않고 재연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해 시청자와 범죄자로 하여금 거리감을 유지했다. 반면 《증오》는 살인자의 소통을 통해 집필된 작품임을 밝혀, 독자로 하여금 살인자의 변을 직접 읽는 것과 같은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일명 ‘트루 범죄 콘텐츠’가 매체를 안 가리고 인기가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감상하는 이에게 ‘상대적인 안락함’을 주는 뒤틀린 도파민 때문이라 하는데, 살인자의 목소리를 일대일로 마주하는 이런 창작물은 감상자를 향한 직접적인 폭력에 가까워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한편 아순타 사건과 호세 브레톤 사건은 모두 양쪽 부모 또는 한쪽 부모가 저지른 자녀 살해 사건이라는 점은 같지만, 아순타 사건은 가해자가 친부모가 아닌 양부모였고 피해자는 중국에서 입양된 사건 당시 12살의 소녀였다는 점도 호세 브레톤과 다른 점이다. 스페인 대중은 아순타 사건의 피해자에게는 감정적으로 어쩔 수 없이 덜 이입될 수밖에 없다. 또한 호세 브레톤 사건은 이 사건의 당사자인 전처 루스 오르티스가 언론을 통해 고소 사실을 밝히고 책의 출간 금지를 직접 호소한 것도 더욱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너무나 가까운 ‘나의 이웃’을 해친 가해자의 목소리를 직접 담은 책인 셈이다. 이런 점들로 인해 비록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사회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출판사 아나그라마는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 16일, 자발적으로 《증오》의 판권을 포기하고 작가와의 모든 계약을 파기했다. 이로써 루이헤 마르틴 작가의 원고 《증오》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다시 새로운 출판사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트루 범죄 콘텐츠가 돈이 되는 세상이다. 실화 범죄 소재는 쉽게 자극을 줄 수 있고 그 자체로 화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콘텐츠를 활용한 장르와 매체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단순히 ‘표현의 자유’라고 치부하기에는 조금 위험한 지점이 보인다. 결국 표현의 자유라는 것도 공익과 가치의 효용이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하고 존중받는 권리가 된다. 단순히 자극이나 일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사그라져 버리는 표현의 자유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스페인 출판계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출판 윤리와 표현의 자유의 균형을 다시 잡아야 할 것이다.
참조
El Nacional 4월 16일 자 뉴스
범죄자 회고록 출간이 불러일으킨 스페인 출판계 내 표현의 자유 논란, 인세, 인쇄출판, 자가출판
<출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