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경계인 허무씨
도서정보
저자 : 이오제
ISBN : 978-89-6131-160-1
페이지 : 270 page
발매일 : 2024-11-12
크기 : 152*225mm
정가 : 20,000
책소개
한일관계의 역사소설을 쓰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대부분 작고하셨거나 살아계신다면 백세에 육박하신 분들의 얽히고 설킨 그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홍명부는 1917년 의주에서 출생한다. 1939년에 아버지 홍병서의 강요로 신의주 금융조합 사원으로 일하던 중에 일본 도쿄의 메이지 대학에 유학하러 간다. 그곳에서 아키코를 만나 결혼을 하고, 신주쿠에서 사이토 미노루의 도움을 받아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다. 아키코와는 아들 신지(新地)와 요시로(義郞)를 두었다. 두 아들의 이름을 붙이면 ‘신의주’의 파자가 완성된다.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였다, 홍명부는 1943년 7월에 관동군 징집 영장을 받고, 아키코의 오빠 이치로는 그를 따라 자원입대를 결심한다. 홍명부는 후쿠오카에서 만난 가토 사나에에게 아키코와 두 아들을 부탁한다. 사나에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이후 관동군에 입대한 홍명부는 봉천 일본군 사단에서 그의 고향 친구이자 일본 사관학교 출신인 김광엽을 상관으로 만난다. 그러던 어느 날, 길림시 길거리에서 중국인 마적단에게 습격당한 이치로는 그들에게 살해당한다. 그는 죽기 직전 홍명부가 ‘조광무역 상회’에서 해고되고 전쟁터에 끌려오게 된 것이 사이토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전해 들은 홍명부는 관동군을 탈영한다. 신의주에 들러 어머니 박씨를 뵌 후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가고자 했으나,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 가는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 한다. 이후 서울에서 잠시 ‘서북청년회’에서 일하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의 조선소로 일자리를 바꾸고, 함께 일하던 정호근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가족들과 재회한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이치로와 자신을 파멸시키고자 했던 사이토를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로 그친다. 6.25 전쟁 이후 홍명부는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의주와 정주 출신 군인들이 많이 출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광엽의 도움을 받아 군납 업무를 시작해 사업을 번창시킨다. 그러나 홍명부는 여전히 일본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한다. 그러던 중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홍명부는 도쿄로 가아키코와 큰아들 신지, 그리고 그때까지 함께 있던 사나에를 만난다. 홍명부는 자신이 일본에 불법체류자로 남는다면 두 아이의 앞길을 막는 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귀국한다. 홍명부는 우수 기업인으로서 훈장과 상장을 받는 박명근(사이토 미노루)을 TV에서 본다. 그가 죽지 않고 한국에 들어와 사업가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홍명부는 다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다. 1986년, 홍명부는 박명근(사이토)의 별장에 잠입해 목덜미를 칼로 찌른 뒤 정원 나무 밑에 묻었다가 며칠 후에 자수한다. 홍명부는 관선 변호사 임신환에게 자신의 일생과 범행 동기를 밝힌다. 그러나 재판정에서의 변론은 당시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다. 사형 집행 이후, 임변호사는 그의 일대기를 정리한다. 역사학 교수가 된 자신의 대학 후배인 엄기백교수에게 전해준다. 임 변호사로부터 자서전을 전해 받은 엄기백은 홍명부의 일본인 가족을 찾기로 마음먹는다. 엄기백교수는 한국에 남아있는 일본인 잔류고아 인들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하다가 뜻밖에도 자기 집안 내력과 과거사에 맞부딪힌다.”
이상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본문에 나오는 지명과 고유명사(학교, 철도 역사 등)는 허구가 아니며 그 당시에 실존했던 명칭들이다. 또한 중국 동북부의 봉천과 평안북도의 순천에 이르는 철도 역시 당시에 달렸던 기차였으며 당시 일본과 한반도에서 달렸던 기차 이름과 시간, 요금 등도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 건너와서 정착한 일본인들이 약 96만 명에 이르렀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며 이들이 모두 귀국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남았는지 그러한 통계가 없는 것 역시사실이다. 당연히 1950년 6.25 전쟁이 어쩌면 모든 것을 잃게 만들고 단절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대화 내용등은 허구이지만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는 주변 상황은 추측가능하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과거의 기록을 보전하고 여러 역사적 문헌을 남기는 민족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글쓰기가 가능했다고 본다.
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아도 봤지만 스스로 자문도 많이 했다. 물론 몇 가지의 계기는 있었다. 본문에서 나오는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인 순천과 벌교 얘기는 사실이고 일본인 잔류인이 남아서 일식집에 갔던 것도 실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본문에서 나오는 몇몇 에피소드들 역시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반역한 이들을 비난하기 위해 시작한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 땅에 남았던 ‘잔류 일본인’들과 그 후손들의 활동에 관해서 쓰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주의적이고 그것에 저항하지 못한 운명 속에 던져져 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쓰고자 했다. 두 세대를 넘는 긴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가까이서 발견할 수 있는 또는 여전히 한일관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저자소개
이오제(李五齋)
필명.
일본동경대학교에서 수학.
장기간 일본체류.
한국의 모대학 교수 역임.
목차
1
1910년 8월 7일, 한덕배 피살
홍명부의 일본 유학
아키코와의 동거
1940년 1월, 신주쿠에서의 삶
시모노세키와 후쿠오카
후쿠오카에서의 첫날
후쿠오카에서의 둘째 날
한덕배의 아들 사이또 미노루
사이또 미노루 조선인 호적을 사다
사이토, 조선인 박명근이 되다
사이토(박명근), 부산 영도에서 보희와 살림을 차리다
아키코의 임신
홍명부, 1943년 7월 징병으로 징집되다.
1944년 1월 관동군 132여단으로 배속
1945년 사나에와 아키코의 피난 생활
1945년 6월, 이치로의 죽음과 사이토의 계략
1945년, 이치로의 부음(訃音)
홍명부, 관동군에서 탈영하다
고향 의주에서 어머니 박씨와의 만남과 헤어짐
홍명부의 아버지 홍병서의 일생
1945년 8월 13일, 홍명부 신의주에서 탈출하다
1946년의 서울
1948년 부산 영도에서 삶
1949년 1월 1일, 일본으로의 밀항
일본의 가족들과 재회
사이토에게 상처를 입히다
6·25전쟁의 시작과 부산으로의 피난
1954년 서울 생활의 시작
1963년 12월, 홍명부와 김광엽의 만남
1968년, 일본의 가족들과 재회
1986년, 홍명부가 사이토(박명근)를 살해하다
1987년 4월, 사형수 홍명부의 법정 최후 진술
2
1993년 일본 동경대학 기숙사에서의 송년회
잔류고아(殘留孤兒)
교토에서 홍명부 가족을 만나다
엄기백이 자신의 과거를 찾아 가나자와(金澤)에 가다
한일부흥회와 나오꼬의 아버지 나베지마 슈헤이사장
나베지마 슈헤이 사장과 가나자와 신문사의 요네자키 기자(記者)
가나자와(金澤)에서 교토로 가서 홍길랑을 만난 엄기백
나베지마 나오꼬의 가출과 서울행
엄기백과 후배 김교수에 대한 뒷조사
사사카와 평화재단의 한국에서의 활동
엄기백교수와 나오꼬의 기자회견
책 속으로
“내가 부임한 이후 총독부가 민적법을 개정해서 호적 업무가 우리 법원의 사무가 되었거든. 그때 자세히 봤는데 말이지, 일조수호조규 체결 뒤 54명에 불과했던 조선 내 일본인이 1895년 말에는 1만 명 정도로 늘었어. 통감부 시절에는 4만 명 정도였다가 합방이후에는 12만 명을 넘었고 말이야.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53만 명에 달하고 있지. 이를테면 후쿠오카보다 이곳에 사는 일본인이 더 많다는 얘기야. 단지 경성과 경상남도에 모여 살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좀 더 넓게, 조선 전 국토로 퍼져서 살아야 해.”
잠시 숨을 돌린 기무라가 말을 이었다.
“벌써 이곳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만 해도 많아. 그들의 고향은 조선이야. 문제는 그들이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인 거리에서 살면서 일본인 소학교를 다니고, 일본풍 생활 양식에 따라 자랐다는 거야. 그러니 조선인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거지. 앞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일본인들이 자네처럼 조선인 현지처를 두거나 혼인을 해서 내지화를 시켜야 해. 이게 바로 좀 전에 말한 대동아 공영권을 위한 진정한 일보전진인 거야.”